4.3항쟁 70주년, 다시 국민 여러분의 힘을 모아주십시오.
-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를 제안하며-
내년은 제주4.3항쟁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4.3을 온몸으로 겪으며 고통 속에 한 생을 살아내야 했던 분들은 대부분 돌아가셨고 남은 생존자들도 80~90대의 초고령이 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되어 공식적인 진상조사를 통해 국가권력에 의한 참혹한 인권유린과 대량학살임이 인정되어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하여 사과했습니다. 희생자들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폭도'라는 낙인을 벗었고, 유족들은 비로소 마음껏 소리 내어 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4.3평화공원이 조성되어 희생자들의 위패가 안치되고 재단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로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신원은 이루어졌습니다. 10여년에 걸친 유족과 제주도민들의 분투와 더불어 4.3항쟁 50주년을 맞아 결성된 제주4.3 범국민위원회를 통해 국민적인 연대의 힘을 모아내 이룬 성과였습니다.
이러한 성과 때문에 “4.3은 잘 해결되지 않았느냐”, “아직도 해결한 문제가 남아 있느냐”고 묻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4.3항쟁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향한 첫걸음을 뗐을 뿐입니다. 과거청산의 보편적인 기준에 비추어 보더라도 지금까지 이룬 성과는 한마디로 가장 중요한 ‘정의(justice)의 원칙’이 빠진 반쪽짜리 명예회복일 뿐입니다. 국가의 행위에 잘못이 있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배·보상은 아직 논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단죄도 화해와 상생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졌습니다. 사법적 처벌은 논외로 하더라도 주요 가해자의 범죄 사실 기록과 공표, 가해에 근거한 서훈의 취소 등 역사적, 도덕적 단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에 분명히 기록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국 교도소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생존 수형인들도 아무런 구제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70주년은 역사적 비극으로서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4.3평화공원을 다녀온 분들은 거기에 누워있는 ‘백비’를 보셨을 것입니다. 이 누워 있는 백비는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4.3을 상징합니다. 지금까지의 명예회복은 단지 억울하게 죽었음을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치 교통사고와 같은 어떤 ‘사건’에서 그냥 피해를 당한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4.3의 기점인 47년 3.1절 대회에 당시 30만 인구 중 6만여 명이 모였고, 그에 이어진 탄압에 맞서 관공서까지 포함하여 사상 유례 없는 도민총파업에 나섰던 제주도민은 어디로 갔습니까? 당시 주민들은 단순한 피해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역사의 주체로서도 조명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4.3은 바른 이름을 얻고 역사에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70주년은 4.3의 정명을 위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4.3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학술연구와 문화적 형상화, 그리고 사회적 공론화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정의로운 해결과 역사적 자리매김에 나서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4.3을 낡은 이념적 대결의 틀에 가두어 그간의 성과마저 되돌리려는 수구세력의 공세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봉기에 이르는 맥락을 무시한 채 4.3을 이북이나 남로당 중앙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빨갱이 나라를 만들겠다고 느닷없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가 ‘공산폭도에게 면죄부를 주고 국군과 경찰을 양민 학살범으로 정죄하였다’고 강변하며 소송전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소송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무장대 수괴급에 대해 재심사를 해서 4.3공원에서 ‘불량위패’를 철거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동안에는 이러한 구시대적 이념 공세로부터 그동안의 성과를 지키기에도 힘겨웠습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는 수구세력의 생떼를 받아들여 위패 재심사를 추진하는가 하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4.3을 폄훼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화해와 상생의 기치가 무색하게 여전히 상당수 희생자들은 무장대 지도부였다는 등의 이유로 평화공원에 안치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70주년을 앞둔 4.3의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4.3은 아직도 잠들 수 없습니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에 맞서 그동안의 성과를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피해에 대한 배·보상과 가해자에 대한 역사적 단죄, 미국의 책임 인정과 이행 등 정의로운 과거 청산을 완결할 돌파구를 열어야 합니다.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누워있는 백비에 이름을 새겨 일으켜 세우기 위한 공론화도 시작되어야 합니다. 제주도민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지 않으면 이루기 어려운 과제들입니다.
지난해 말 이후 우리 국민은 촛불항쟁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낡은 기득권 체제의 실상이 드러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들이 기득권체제의 유지를 위해 왜곡시키려고 했던 역사도 촛불의 눈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제주4.3의 역사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들을 제기하고 해결할 기회입니다. 70주년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제주의 4.3운동과 시민사회 단체들부터 하나로 뭉쳐 나서려고 합니다. 4.3의 진실을 덮고 반세기를 넘길 수 없다고 힘을 모아주셨던 50주년 때처럼, 4.3의 정의로운 해결과 역사적 자리매김을 위한 돌파구를 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국민적 연대의 힘을 모아 주십시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에 함께해 주십시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결성 선언문
지난 겨울 이후 우리는 역사적인 촛불혁명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정의의 편에 서고자 했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적폐 청산을 외치며 명예로운 승리를 일구었다. 촛불혁명의 승리는 해방 이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해온 적폐들을 청산할 절호의 기회를 열었다. 이 적폐의 뿌리는 친일과 독재로 이어지는 청산되지 못한 오욕의 역사다.
그늘진 우리 현대사의 출발점에 3만이 넘는 제주도민이 비명에 쓰려져간 제주4.3이 있다. 반세기가 흘러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시대에 4.3특별법이 제정되고 공식적인 진상조사를 통해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유린과 대량학살임이 확인되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했고, 4.3평화공원이 조성되어 희생자들을 기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가족을 잃고도 빨갱이, 폭도라는 오명이 두려워 마음껏 울지도 못했던 유족들은 비로소 어깨를 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70주년을 앞둔 제주4.3은 아직 편히 잠들 수 없다. 과거 청산의 근본은 잘못을 바로잡아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국가의 잘못으로 생긴 피해는 구제되어야 하고, 그러한 잘못을 야기한 책임자들은 분명히 가려지고 단죄되어야 한다. 특히 군정기는 물론 그 후에도 실질적인 통제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책임도 물어져야 한다. 정의로운 청산 없이는 유족과 제주도민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고, 나라 전체가 참된 정의와 인권, 평화로 나아갈 수도 없다.
4.3은 청산되어야 할 아픈 역사일 뿐 아니라 계승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제주도민들은 지역공동체의 주인이자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해 가는 주체로 나서 분단과 탄압에 맞서 싸웠다. 분단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벗고 보면 4.3이 곧 촛불이다. 4.19나 5.18과 마찬가지로 불의한 권력에 맞서 국민이 주인으로 행동한 역사다. 70주년은 4.3을 역사에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냉전과 분단으로 귀결되는 지정학적 대립 속에서 섬 전체가 겪었던 아픔을 치유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선포된 ‘세계평화의 섬’은 단순한 구호나 장식일 수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역사로서의 4.3은 점점 긴장이 고조되는 동아시아에서 제주가 전쟁의 전초기지가 아니라 평화의 전진기지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참극을 겪은 생존자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4.3의 진실과 교훈은 올곧게 전해져야 한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제주도민들만이 일일 수도 없다. 이에 제주4.3항쟁 70주년을 1년여 앞둔 오늘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전 국민의 힘을 모아 4.3의 정의로운 청산과 역사적 자리매김, 그리고 4.3정신의 현재적 계승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다는 결의로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의 결성을 선언한다.
2017년 3월 24일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결성 대표자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