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조상님들을 애도하면서
현 기 영
춥고 음울했던 겨울은 지나가고 이제 봄입니다. 신생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들머리, 밭두렁, 언덕에, 묵은 풀 속에서 새 풀이 파랗게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바다 물빛도 더욱 푸르러지고, 파래도 미역도 더욱 빛깔이 고와졌습니다.
여기저기 들판에 노란 유채꽃이 무리지어 피어났습니다. 함성처럼 일시에 피어난 저 유채꽃 무리들을 보면서, 우리는 남북분단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국가를 외쳤던 70년 전의 그 함성과 처절한 수난을 떠올려 봅니다.
오늘 우리는 70년 전 무도한 총칼에 무수히 죽고 간, 서러운 조상님들을 추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너무도 억울한 죽음이기에 조상님들은 아직도 저승 상마을에 좌정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무리지어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이는 아무래도 4.3 조상님들을 애도하는 우리의 정성이 아직도 미흡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리밭에 보리 베어지듯이 밋밋하게 쓰려져갔던 수많은 원혼들, 그 서러움과 원한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모였습니다. 단지 젊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던, 인생의 삼분지 일도 못 살고, 전도양양한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긴 채 쓰러져야 했던 그 수많은 젊은이들,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른 채 죽어간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와 아이들, 젖먹이 아기들의 슬픈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요행히 살아남았어도 억압과 공포 속에 죽은 듯이 살아야 했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던 피해 생존자들, 떼주검이 널렸던 밭에서 평생 피 냄새를 맡으며 농사짓고, 날만 궂으면 얻어맞은 묵은 상처가 도져 서럽게 술로 달래는 그 분들의 슬픔을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 와 있습니다.
돌아가신 그 분들의 원혼을 달래는 길은 우리가 그 원한, 그 슬픔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4.3의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 끊임없이 되새기는 일, 대를 이어 미체험세대가 그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유대인 대학살이 행해졌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다음과 같은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 불행한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그 과거를 다시 반복할 운명이 된다는 말이죠. 이 경구에서 아우슈비츠 대신에 4.3을 대입해서 말해 봅시다.
그러나 4.3의 원혼을 제대로 진혼하려면, 애도와 기념식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그 분들은 지금 우리에게 4.3의 슬픔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애도와 기념식만 하지 말고, 앞으로 더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그 희생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4.3의 원혼은 애도나 기념식만으로 진혼되지 않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제대로 진혼하려면, 분단 반대, 통일국가를 염원하여 항쟁했던 그 분들의 뜻이 대한민국 역사에 제대로 명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4.3은 동전의 안팎처럼 수난과 항쟁이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4.3에 대한 공식적 논의는 한국사회에 미만한 극우반공주의 때문에‘항쟁’ 부분을 외면한 채 거의 ‘수난’부분에 국한되다시피 해 왔었죠.
잠깐 생각해 봅시다. 해방 당시 전 민족적 선결과제는 해방과 동시에 그어진 3․8선의 철폐와 일제 잔재의 일소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점령이었죠. 새 국가를 건설하려면 남북을 하나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 옳지, 남북 각각의 단독정부를 세워서야 되겠는가, 하고 전국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죠.
그러니까 제주도민에게 죄가 있다면, 온 국민이 반대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죄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것이 죽을죄란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모순과 문제가 남북분단에서 야기된 것이 아닙니까. 4.3항쟁의 대의명분은 옳았습니다.
그러므로 4.3의 조상님들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4.3항쟁이 역사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했을 때야 비로소 4.3 원혼들이 편안히 진혼되어질 것입니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